생리대 꼭 숨겨야 하나



몇년 만에 보는 친척 조카가 집에 놀러왔습니다. 부엌에서 이야기 나누는 어른들을 피해서 이 방 저 방을 어슬렁거리더니 어느 새 제 방에도 들어왔습니다. 좁디 좁은 방이라 어디 앉으라고 할 곳이 없어서 주저하고 있는데, 아뿔싸, 아무렇게나 놓아둔 생리대 봉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요 녀석이 눈치 못 채게 치우려는 심산으로 엉금엉금 움직이고 있는데, 제 몸짓이 수상했던지 바로 녀석에게 들키고 말았죠. 중학생. 왕성한 호기심. 말 수 없지만 고집세 보이는 표정. 생리대를 집어 든 녀석에게 제가 엄하게(?) "있던 자리에 내려놔."라고 했습니다.

녀석은 신경도 안 쓰더군요. 요즘 애들이 다 이럽니까? 쯧쯧. 어른 말을 막 무시하고, 제 품에 있던 강아지에게 생리대를 던져서 물어 오게 하고, 주거니 받거니,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저보다 덩치가 커서 쥐어박을 엄두도 안 나고... 찢기는 생리대, 찢기는 내 돈. 생리대 은근히 비싸잖아요.

제 방이 좁았던지 녀석이 강아지를 데리고 거실로 나가려고 하더군요. 제가 생리대 놓고가,하고 다시한번 엄하게(?) 말했습니다. "왜요?" "생리대잖아. 그거 사람들 다 보게 갖고 있는거 아냐." "왜요?" "아, 왜긴 왜야, 남들이 보면 창피하잖아." "왜요? 왜 창피해요?" "그냥 창피해. 그니까 냅두고 나가." "여자들 다 하는게 뭐가 창피해요?"

그러게요, 왜 창피할까요? 저는 생리대가 왜 창피해서 거실로 못 들고 나가게 했을까요?

생리대는 꼭 숨겨야 하는 물건??

어릴 때 생리대를 책상에 꺼내놓았다고 선생님은 절 나무랐고, 엄마는 아빠나 남동생이 본다고 욕실에 못 두게 했습니다. 갑자기 생리를 시작한 친구가 생리대 하나 달라고 하면, 누가 볼 새라 테이블 밑으로 건네거나, 가방을 통째로 주어야 했습니다. 슈퍼에서 생리대를 사면 계산하는 아주머니는-아저씨도-당연한 듯이 검은 비닐봉지에 싸주셨죠. 난 아무 요구도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누군가 검은 봉지를 들고 있으면 "너 생리대 샀어?"라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대학 때 처음 만난 남자친구와 첫 공식 데이트 하던 날, 차마 "나 갑자기 생리를 시작했어."란 말을 못해서 불편함을 내색 못하고 끌려다니다시피 했습니다.

"생리해." "마법에 걸렸어." "그거 해." 가끔 "터졌어."까지. 왜 저는 이 당연한 말을 회사 동료에게, 선후배에게, 친구들에게, 상대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하지 못 했을까요? 여성이라면 누구나 하는 생리를, 생리대를 완벽히 숨기지 못해 그토록 안달냈을까요?

생리대를 숨기면 여성과 남성의 소통이 막힐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박힌 습관 때문에 아직도 생리대를 숨겨야 한다는 강박은 있지만, 차츰 나아지고 있습니다. 남자친구(보자기)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보자기도 처음엔 창피해했지만, 제가 생리때만 되면 짜증내고 집에만 있으려고 하니깐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하나씩 얘기를 꺼내게 되었구요. 생리에 대한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하면서 생리에 대해 생리대에 대해서 관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남자들이 생리에 대해 얼마나 알지 궁금합니다. 여성이 생리대를 숨기면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단절을 낳지 않았나 의심해 보았습니다. 여성이 숨기니 남성도 모르고, 남성이 생리를 모르는 만큼 여성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닐까. 생리를 알아야, 여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리. 제 화장대 위에는 김연아 선수 얼굴이 박힌 생리대 봉투가 아직도 있습니다^^

김연아 선수도 생리대를 숨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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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는 한번에 썰 수 없다


안녕하지 못한 하루가 저녁 7시를 넘겼습니다. 온다는 비가 신통치 않게 내리더니 지금은 그쳤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네요. 배는 부른데 머리 속은 텅 비어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다행히 사무실에 혼자 있을 시간이 생겼습니다. 

학업부진아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업무는 하루를 넘기기에 급급하고, 생활은 진창 속에 빠져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힘에 부칩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던가. 돌아보고 돌아봐도 황사 낀 뿌연 하늘마냥 분명한 것 없이 답답합니다.

내용과 아무 상관 없으나 예쁘죠?

아무래도 며칠 전에 받은 전화 한 통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예전 직장의 상사가 갑자기 전화를 주셨습니다. "야이 자식아, 넌 안부 전화 한 통을 안 하냐!"는 원망을 시작으로 제 현재 생활을 꼬치꼬치 캐묻더니 "왜 그렇게 됐어."로 마무리 하셨습니다. 왜.

"왜 그렇게 됐어."의 의미란, 꿈 이루겠다고 큰 소리치고 나간 녀석이 어찌하여 본인의 장담과는 다른 장소에 앉아 있냐는 겁니다. 왜긴 왜겠어요, 뜻 대로 안 된거죠. 세상에 널린 뻔한 스토리 아니겠습니까, 노력했으나 이루지 못 했다는, 듣기도 말하기도 지겨운 그것.

2008년 겨울에 친구의 떡볶이 장사를 도와 주면서 생전 처음 순대를 썰어 봤는데, 그게 참 안 썰리더라고요. 순대껍질이 얇고 미끌거려서 요령이 없으면 썰 수가 없습니다. 친구는 척척인데… 딱 한번 썰어보고 다시 못 썰었어요. 손님은 밀려드는데, 초보자인 제가 연습삼아 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친구가 장사를 접었습니다. 딱 한번은 셈에 들지 않는다,는 외국 속담도 있다던데, 저는 한번의 경험으로 '나는 순대를 못 써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낸거죠. 두고두고 아쉬운 순대 썰기입니다.

옛 직장 상사에게 성공했다고도 실패했다고도 대답하지 못한 건 순대 썰기와 같은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난 딱 한번 도전했을 뿐인데. 그게 비록 1년이 걸린 일이긴 했지만, 제 인생에서 딱 한번의 도전이었죠. 변명 같지만 제 마음 속에는 분명 그렇게 남았습니다. 한번은 셈에 들지 않으니 두 번에서 이루지 못하면 그때 '실패'란 단어를 쓰겠노라. 변명같네요.

여전히 비 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가뭄 해갈은 언제 될런지.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사실, 저의 노력은 끝을 보인 듯 합니다. 스스로 확신이 있었다면 "왜 그렇게 됐어."에 분명한 답을 했겠죠. 서른에도 전 여전히 방황하고 있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는 끝날 줄을 모르네요.

전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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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뉴스 베스트에 올라 - 놀라움과 부담이 동시에


블로그를 시작한지 세 달이 되어가면서도 별 일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던 중에 드디어 큰일을 만났습니다. 평균 방문자수 기십명을 헤아리다 어제 6천여명의 손님을 맞게 된거죠. 오늘은 그 수가 줄어 2천 6백명 정도.


헉! Daum 블로거뉴스 베스트에 오른 겁니다. 2009/02/11 - [주먹의작은생각] - 성추행 상황에서 여성의 최고 무기는? 방문자 숫자에 한번 놀라고 블로뉴스 4위에 두번 놀라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점심 먹은 후부터 체한 것 같더니 급기야 열이 올라 몸져 누운 상태에서 동생이 확인시켜 준 모니터만 멀뚱멀뚱 바라보다 기다리던 일이 생긴 것에 반갑기 보단 걱정이 먼저 들었습니다.

포스트가 베스트에 오른 사실을 확인한 시각이 밤 8시 40분 경이었는데 당시에 댓글이 2개 달려 있었는데, 그 중 처음이 극단적인 여성비하였습니다. 아, 블로그를 하면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댓글을 보니 대책이 안 섭니다.

이걸 지워 말어? 블로그라면 어떤 의견이든 개진할 수 있어야 마땅한가? 모욕적인 발언이므로 지워도 상관 없을까? 그렇다면 '모욕적인 발언'의 기준은 무엇이란 말이냐? 등등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습니다. 

우선 내린 결론은 지우지 않기. 다음 날 사무실에 나가서 2008년 파워 블로거로 등극하신 팀장님께 여쭈어 보고 행동하기로 했습니다. 결정은 이렇게 내렸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은 찝찝한 기분을 안고 잠들었습니다. 

몸이 안 좋은 상태로 출근하자마자 동료의 도움으로 손을 따고 (생애 첫 바늘로 손 따기, 효과 짱입니다!) 병원도 가느라 정신없이 오전을 보내고 저녁 늦게 팀장님께 여쭤보게 되었죠. 답은 간단했습니다. "지워!" 욕설이나 성인관련 발언 등은 지우는 게 낫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팀장님은 블로그에 공지사항으로 이미 명시해 놓으셨더라고요. 

아직 지우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보자마자 지우지 않았더니 문제 댓글에 답하는 댓글이 달렸는데,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라 아예 아무것도 지우지 않았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상하면, 다른 사람 보기에도 이상하구나'를 확인하니 안심이 되어서 놔두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욕설에 해당하는 비하발언은 지울 생각입니다. 

'성추행'이 주제라서 그런가 십여개가 넘는 댓글 중 3개를 제외한 나머지가 로그아웃 상태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본인이 누구인지 알리고 싶지 않으셨나 봅니다.

처음 블로거뉴스 베스트에 오르고, 처음 악플(?)을 겪고, 처음 작성자가 누구인지 모를 댓글을 받아보고… 놀라움과 부담을 동시에 안겨 준, 블로그를 제대로 겪었습니다.

그저,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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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상황에서 여성의 최고 무기는?


아침에 뉴스 검색을 하다가 치한을 만났을 때 여성의 핸드백이 무기가 될 수 있단 기사를 봤습니다. 홍보기사 같긴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네이버 메인에 올랐더라고요.

괴한 만났을때 여자의 최고 무기는 핸드백   
 
괴한을 만났을 때 유용한 무기는? 핸드백.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사람과 동승할 때는? 층수 버튼을 먼저 누르지 말 것. 강호순 연쇄살인을 계기로 여성들의 자기 보안 필요성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출처 : 매일경제 기사원문보기>

기사 제목을 보자마자 제가 스무 살때 겪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성추행, 제가 당한 적이 있었고 당시에 가방을 사용해서 패 주었죠.

신촌에 있는 유명한 술집이었는데, 맥주 마시면서 음악 듣는 곳으로 유명했어요. 한쪽 벽을 꽉 메운 LP판을 쉬지 않고 틀어대는 긴 머리의 주인 아저씨. 단순히 술 마시러 오는 곳보다는 음악을 즐기러 와서 맥주도 한잔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벌써 십년이 됐네요. 당시엔 자주 갔지만 그 일 이후론 신촌 근처도 가길 꺼려했기에 아직 그 곳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일이 있던 날도 여느 날처럼 맥주를 앞에 두고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저나 친구나 술을 잘 못해서 병맥주 각 1병이면 음악에 맞춰 몸을 살짝 흔들 정도로 흥을 돋울 수 있었습니다. 학생이다 보니 돈도 없고, 많이 마시고 싶은 마음도 없고, 맥주 한 병에 몇 시간씩 원하는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누리는 곳.

그 곳은 화장실이 홀 안에 있어서,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겠다, 남녀 각각 하나의 화장실이겠다, 줄이 길지 않더라도 테이블 사이까지 나와서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느 날처럼 화장실에 가려고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제가 맨 뒤였어요.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는데 몇 발자국 건너에서 어떤 남자가 술에 취해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면서 슬슬 제 쪽으로 걸어오더군요. 화장실 가나보다, 엄청 취했구만...하고 생각하는 둥 마는 둥 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제 뒤로 오더니 엉덩이를 만졌습니다. 양손으로. 스치거나 모르는 척 만진 것도 아니었죠. 한번을 '제대로' 만지더니 어딘가로 훌쩍 가버렸어요.

시간이 흘러서 이런 경험이 있는 분들하고 얘기해 보니, 대부분 저처럼 너무 놀라서 꿈쩍 못 했다고 하더군요. 전 그 사람이 엉덩이에 손을 갖다 댄 순간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헉' 소리도 낼 수 없었어요.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 순식간에 벙어리가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복잡한 술집이고 다들 음악 듣느라 절 본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으로 그 자리에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친구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돌아갔습니다.

친구가 제 굳은 얼굴을 보고 왜 그러냐고 묻는데 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화나고, 창피하고, 어찌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입이 움직이지 않더군요.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술집을 나갈 생각에 가방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괜히 눈물이 났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출입문을 향해 나가고 있는데, 아뿔싸, 그 놈이 바로 출입문 근처에 앉아 있는 겁니다. 얼굴을 본 순간,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가방으로 내려쳤죠. 한번 두번 계속 사정없이 내리쳤는데, 그 남자는 꿈쩍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습니다. 너무 취해서 자기가 맞는지조차 몰랐던 거죠. 내가 수치심을 느낀 만큼 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그때부턴 본격적으로 울었던 것 같습니다. 계속 그 남자를 가방으로 때리면서 소리내서 울었어요. 친구가 왜 이러냐고 소리치고, 주인아저씨 뛰어와서 말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이 그러다가 술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저를 따라 나온 친구가 저 남자가 너한테 무슨 짓 했냐고, 자기가 가만 안 두겠다고 욕하면서 날뛰는데 '범인'의 일행인 듯한 남자분이 저희를 쫓아 나오셔서, 왜 그런지 묻더군요. 저는 흥분해서 아무 말 못하고 분노에 찬 울음범벅이었는데, 짐작을 하셨는지 취한 친구 대신 사과하겠다며 백배 사과하셨습니다.

'최고의 무기 핸드백'이라 할지언정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은 씁쓸한 경험. 시간이 많이 흘러서, 문제 상황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핸드백은 최고의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최고의 무기는 바로 '정신 똑바로 차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울며불며 뛰쳐나오는 것보단 분명하게 알리고 사과를 받았다면 - 물론 완전 술이 취해서 정신 빠진 놈이었지만 - 어땠을까? 정도가 약한(?) 성추행에 그쳤으니 망정이지, 더 심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면 저처럼 흥분해서 때리는 행동은 오히려 나쁜 효과를 불러오리라 여겨집니다.

성추행이나 괴한을 만나는 일 따위 전혀 없으면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니 조심할 수밖에요. 아무리 대책을 세운다한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사안의 경중을 떠나 상처가 남게 마련입니다. 여성도 남성도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할 일입니다. 저한테 가했던 놈도 그저 취해서 저지른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놈은 자신의 잘못을 모른 채 발 쭉 뻗고 자겠죠? 저는 아직도 저런 기사만 보면 부르르 화가 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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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아저씨에게 안길 뻔한

무릎 튀어나오고 빛은 바랠 대로 바랜 추리닝 바지에 목 늘어난 티셔츠. 집안에서 입는, 엄마 표현을 빌자면 '걸레짝'같은 옷에 외투만 걸치고 대문을 나와 몇 발짝 걸어 나가자마자 골목 초입에 들어오던 낯선 중년 아저씨가 두 손을 번쩍 들고 나를 향해 돌진해 왔다. 아저씨는 두 손을 흔들면서 나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오더니 내가 상황 파악도 하기 전에 내 코앞에 섰다.
 
아뿔싸, 나는 그제야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앞을 가로 막은 아저씨의 옆구리로 가볍게 빠져나왔다. 아저씨는 나보다 훨씬 컸고 난 아주 작았으니 민첩함이 없어도 가능했다. 이젠 아저씨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는데, 그때 마침 저 뒤에서 손에 짐을 바리바리 든 아주머니가 뒤뚱뒤뚱 빠른 걸음으로 오시면서 소리 질렀다.

"거기 중현이 아냐! 여자잖아!"

아. 상황 파악은 끝났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나와 같은 골목 어딘가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오셨는데, 나를 당신들 조카로 착각하신 거였다. 여기까진 아무렇지 않은 일이다. 조카가 마중 나온 지 알고 예뻐서 꼭 안아주려던 아저씨는 참 따뜻한 분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중현'은 남자이름이 아니잖은가!! 내가 왜!! 날 왜 남자로 오해하냔 말이다! 아저씨가 달려와서 안으려던 상황을 보아 나이가 많은 조카는 아닐 성싶다. 그렇다면 나는 십대남성으로 짐작되는 오해를 받은 것이다. 아... 여드름 투성이에 수염 듬성듬성 난 십대남성과 내가 어디가 닮은 걸까?

사건은 1분 남짓 된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났지만, 난 그 충격으로 천지가 개벽하는 혼돈과 '나이 값 못하는 외모'로 인한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평생을 두고 나이 값하는 외모를 가져본 적 없음을 다시 한 번 절실히 느끼며 방바닥을 쥐어뜯었다. 거기다 이젠 '남자같다'는 사실이 더해졌다. 괴로워하기에 충분한 이유다.

혹자는 '동안'을 강조하며 위로하려 했지만, '동안'은 백옥 같은 피부에 쌍꺼풀 진한 큰 눈을 가진, 통상적으로 '예쁜' 사람에게나 칭찬이지 나처럼 '보통'의 범주에 쑤셔 넣어지는 사람에겐 그저 '어려 보여서 때론 무시당할 수 있는' 핸디캡일 뿐이다.

화장을 하거나 정장을 입을 자리가 되면 그렇게 하겠지만,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어려 보인다는 사실을 실감할 땐 정말 너무 싫다.

뒤 따라 오시던 아주머니가 "저 사람이 조카로 착각해서 그래. 미안해요."하고 친절히 설명해 주셨는데, 난 충격에 빠져서 "괜찮아요." 한 마디를 해드리지 못 했다. 머쓱해하셨던 아저씨와 사과하신 아주머니에게 별일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혹 골목에서 또 마주친다면 날 알아보실까?

음...남자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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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나이 서른이면 절망이야"


2009년을 며칠 앞두고 선배가 메신저로 말을 걸더니 새해에 몇 살이냐고 묻습니다. 저는 별 생각없이 '30, 서른, 써티, 이립'하고 장난처럼 답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선배의 대답. "여자 나이 서른이면 절망이야." 하, 분명히 농담으로 던진 말일텐데, 나도 농담으로 받아? 아니지, 여성비하에 나이차별을 대놓고 했으니 농담이라도 봐 줄 순 없지, 정색을 하고 화 내? - 약 10초간 큰 혼란 끝에 한 말은 "아, 그런가요?"입니다.

2009년 1월 1일을 시작하는 0시에 종이 땡 치고, 공식적인 서른이 되자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절망스럽나?'

힘내라 서른

서른의 초상?!



결혼을 종용하는 부모님과 반토막 난 펀드, 포기한 꿈의 잔여물가 그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린 이력, 늘어난 기미와 주근깨, 주름, 늘어난 뱃살 특히 아랫배, 무한도전 멤버들보다 더 저질 체력, 나도 모른새 고착되어버린 아집… 이 정도면 '절망'이란 단어에 버럭할 일은 아니군요.


힘내라 서른

보자기와 주먹

결혼 얘기 꺼내는 부모님을 입 막음 할 수 있는 재주, 언제나 내 말에 귀 기울이는 마음이 따듯한 애인, 빌리든 꾸든 약간의 현금 동원력, 갖은 직업이 가져다 준 다양한 경험, 어느새 구축된 말발, 어느 누구하고도 대화할 수 있고 하고 싶다는 열린 마음, 20대 초반이라고 사기칠 수 있는 얼굴, 서로 신뢰하는 친구들, 아직은 꿈 꿀 수 있을거라는 희망, 자리 잡아가는 나만의 취향과 안목,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포용력… 하하, 너무 억지인가요? 내가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들.

살펴본 결과, '절망'은 아니라고 결론 지어 봅니다. 스물 아홉이었던 어제와 서른이 된 오늘이 비슷한 일상이듯 나에게 있는 것들도 스물 다섯 혹은 그 아래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20대를 지날 땐 내가 갖고 있는 지조차 몰랐다고 할까요, 스스로 의식하고 그 근원을 캐내려 애써 생각하는 태도가 서른에 달라진 점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10단위의 나이가 의미있는 이유는 스스로 돌아보고 결산하는 특별한 시간이기 때문일거라 생각합니다. 

선배의 말에서 '절망'에 방점을 찍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자'에 대한 생각은 좀 더 해봐야겠습니다. 스스로 여성임을 깨달은 지 얼마 안되거든요. 20년이 넘도록 자각 못한 사실을 알고 나선 충격이 대단했습니다. 그만큼 '여성'에 대한 고민은 독자적으로 풀고 싶습니다. 음...고민은 '절망'에서 연유했으나 결론은 '서른'에서 났군요. 

이제 본격적으로 서른을 살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큰 기대도 섣부른 실망도 없습니다. 어제처럼 오늘도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저의 몫입니다. 마흔이 되는 순간, "서른은 살아볼만 했습니다. 마흔도 기대되네요."하고 자신있게 말할 정도면 좋겠네요. 여러분도 여러분 나이 만큼 행복하시길.
 
Posted by 편지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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