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마더> 티저


 


박찬욱 감독의 영화<박쥐>와 함께 올해 최고 기대작으로 꼽히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마더>. 아들의 살인누명을 벗기기 위한 엄마의 사투가 벌어진다는 줄거리로 벌써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목이 참신한데요, 엄마, 어머니도 아니고 영어로 '마더'라고 지은데 감독의 어떤 의도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사실 주인공 김혜자 씨는 국민 배우로 대한민국 어머니상으로 인정받았는데, 김혜자 씨가 이제까지 해왔던 어머니 캐릭터와 다른 지점에 있기때문에 같은 의미지만 다른 발음을 가진 '마더'로 정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김혜자 씨도 그렇지만, 오랜만에 나타난 원빈도 반갑네요. 무엇보다 '봉준호'라는 이름 석자가 주는 묵직함이 영화팬인 저를 설레게 만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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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The Reader - 책 읽어주는 남자



영화를 검색하면 영화의 원작이 되었던 소설을 칭찬하는 글이 많습니다. 소설은 더 자세해서 생략이 많은 영화가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vid Daldry) 감독을 좋아하는지라 영화를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스티븐 달드리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디 아워스The Hours>를 만든 영국 감독입니다. 빌리 엘리어트가 그의 첫 장편영화인데, 이 영화를 만들기 전 이미 그는 탁월한 연출력으로 유명한 연극 연출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에는 드라마가, 꾸밈없는 날 것의 진중한 드라마가 녹아 있고, 전 그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제가 본 그의 세 번째 영화입니다. 아무 정보 없이 케이트 윈슬렛과 스티븐 달드리 감독 이름만 알고 봤습니다. 약간 에로틱한 사랑영화일거라 생각했는데,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어서 의외였습니다. <디 아워스>처럼 과거와 현재를 엮어 나가는 구성이 익숙해서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홀로코스트, 10대와 30대부터 시작한 사랑, 재판, 그리고 문맹. 도통 연관지어 지지 않은 소재를 말끔하게 풀어낸 건 스티븐 달드리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무조건적인 찬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마이클이 읽어주는 책에 몰입하는 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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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 The Road>, 멸망 뒤에 삶이 있었다


1.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코맥 매카시

시작은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였다. 영화의 아득한 피비린내에 도취되어, 내친김에 책을 찾아 봤다. 도통 모르겠다. 작가가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는지 분위기는 느끼겠는데, 머리로 이해가 안 된다. 답답하다. 분명 뭔가 말하고 있는 사람의 입은 보이는데 소리는 전혀 들을 수 없는 답답함. 분명 작가는 불친절하다. 따옴표 조차 안 쓴다.

코맥 매카시를 찾았다. 종잡을 수 없는 지식이 넘쳐나는 온라인으로도 건질 내용이 별로 없었다. 유명한 작가라는 확인은 되었다. 유명했군. 작가는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히 숨겨두었나보다. 에잇. 한참 후에 손을 털고 일어났다. <피의 자오선>? 후에 눈에 띄면 읽어봐야겠다. 그게 다 였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불친절한 미국 노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였고 상도 많이 받았다,가 내가 알 수 있는 전부였다.

코맥 매카시? 매카시즘의 매카시야? 혹 그를 아는 사람이 있나 물어보면 이런 대답을 듣기 일쑤다. 그 사람은 아닌데 나도 누군지는 잘 몰라. 미국의 유명 잡지에서 뽑은 100대 소설 중 상위에 꼽히고, 헤밍웨이나 멜빌 같은 유명한 작가의 계보를 잇는대나, 암튼 그래.

2. 대재앙으로 멸망한 문명, 길 위에서 삶은 계속된다 <로드> 


등장인물도 줄거리도 간단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길을 걸어간다. 이미 지구에는 대재앙이 닥쳐서 문명이 몰락했다. 재가 날리는 하늘은 햇빛을 가렸고, 버려진 도시는 재만 가득하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살아난 사람들은 서로를 피해 숨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는 세상. 그래서 아버지는 언제든 자살할 수 있도록 두 발이 장전된 총을 몸에 지닌다.

아버지와 아들은 음식을 찾기 위해 이미 몇번이고 털렸을 빈집을 또 뒤지고, 마트를 뒤지고, 쇼핑센터를 뒤진다. 음식을 찾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다. 딱 한번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방공호를 발견해서 며칠 간 풍족하게 먹고 쉴 수 있었으나 다시 길로 나선다. 누군가에게 발견되면 잡아 먹힐지도 모르니까. 해안가에 도착하면 희망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폐허 속의 희망. 죽음 속의 희망. 희망, 그들은 며칠을 굶고 사람을 잡아 먹은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그 희망을 향해 길로 나간다. 도착한 해안가엔, 그들이 지나온 세상 어디나 그랬듯, 어둠과 죽음 뿐이었다.

「다음 날 정오에 도시를 통과했다. 권총은 금방 손에 잡을 수 있도록 카트 위에 접은 방수포에 올려놓았다. 소년을 옆에 바짝 붙이고 걸었다. 도시는 대부분 탔다. 생명의 흔적은 없었다. 거리의 차에는 재가 떡처럼 덮여 있었다. 모든 것이 재와 먼지로 덮여 있었다. 마른 진창에는 화석 흔적들. 문간에는 말라붙어 가죽만 남은 시체 한 구. 빛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남자는 소년을 더 바짝 잡아당겼다. 네가 머릿속에 집어 넣은 것들은 거기 영원히 남는다는 걸 잊지마. 한번 생각해보렴. 남자가 말했다. 
어떤 건 잊어먹지 않나요?
그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잊고 잊어버리고 싶은 건 기억하지.」

3. 희망도 강요되어 질 수 있다

임신한 여자가 속한 한 무리가 지나간다. 다음 장면에서 갓 태어난 태아로 추정 되는 것이 바베큐처럼 구워지고 있다. 토 할 듯한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지옥에 다름아닌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살아야하는 이유가 뭘까? 왜 그들을 자꾸 길로 내보내고 걷게 만드는걸까? 혹시 살 수 있는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해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버지는 결론을 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세상이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 <로드> 속 세상에선 '희망'이란 단어는 사라져야 한다. 작가여, 희망을 강요하지 말아라. 그것도 폭력이 될 수 있다.

마지막 장에서 희망을 찾은 아들을 확인했어도 난 죽음의 이미지를 놓을 수 없었다. 그만큼 <로드>를 읽는 내내 멸망한 지구가 보여줄 수 있는 암울함을 온 몸과 마음으로 겪어낸 것이다. 책을 읽는 며칠 동안 굶어 지낸 사람은 나였고, 죽음과 사투를 벌인 이도 나였다. 아버지와 아들 옆에 서서 지옥보다 더 지옥같은 세상을 함께 걸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헤어나올 수 없었다. 아들이 마지막에 찾은 희망을 믿을 수 없다. 믿기엔 너무 짧다. 더 보여달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4. 길 위에 아버지와 아들, 영화로 그려지다

할리우드는 멸망한 세상을 걸어나가는 아버지와 아들을 돈 주고 사서 영화로 보여주겠단다. 지구의 종말을 폐허를 시체를 잘 묘사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부디 그들의 희망은 희망답게 보여주지 않았으면 한다. 할리우드식으로 매끈하게 잘 빠진 희망이 나올까 걱정된다. <로드> 속 희망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로드>의 희망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양이어야 한다. 가슴 먹먹함으로 쥐어 짤 눈물도 없는, 모든 것을 체념한 후에 나올 수 있는 희망이 <로드>의 희망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식의 정공법이면 통할 수도 있겠다. 영화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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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어수선한 영화 시사회는 처음, <핸드폰> 시사회



1. 시사회 당첨 통보를 당일 오전에 알려

지난 주에 '서울메트로' 홈페이지에서 신청했던 시사회 당첨 문자가 왔습니다. 앗싸,도 잠시, 이거 오늘이잖아! 오늘 저녁에 당장 시간되는 사람이 누가 있지? 즉시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알아봤습니다. 퇴짜 맞기를 반복하다 다행히 함께 갈 사람을 찾았지만, 당일 통보에 대한 불만이 슬그머니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공짜.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2. 사전행사는 어영부영, 하는지 마는지

처음 찾는 서울극장. 미리 배를 두둑히 채워놓고 일찍 앉아서 시작을 기다렸습니다. 서울극장에서 제일 큰 상영관인 듯 장소가 꽤 넓었습니다. 오페라 극장처럼 2층 좌석이 있어서 신기했습니다. 이리저리 눈 돌리고 있는데, 여성 두 분이 스크린이 있는 무대로 오릅니다. 뭐 하려나, 기대 반 호기심 반. 영화 마케팅 하는 사람이라는 소개가 전부였고, 경품 추천행사를 하겠다며 좌석 번호를 부릅니다. 이게 행사야? 무슨 선물 준대? 몰라, 저 앞에 뭐가 있나? 영화가 <핸드폰>이니까 핸드폰 주나? 지금 부르는 거 맞아? - 제 주변에서 들리는 대화들이 이러한 가운데, 좌석번호 호명이 끝나자 추첨행사는 끝났답니다. 아, 무슨 행사를 이렇게 썰렁하게 하는지. 관객에게 이러저러한 행사를 한다는 간단한 설명도 없이 번호 부르고 끝나는 행사라니… 행사 취지를 못 살릴 바에야 돈 들여 이런 마케팅 할 필요가 있을까. 마케팅에 관심이 있던 사람으로서 너무 아쉬운 사전행사였습니다. 여기까지도 그럭저럭 오케이.

3. 예상 못한 주연배우와 감독의 무대인사, 반가워요!

여배우(몰라요) 엄태웅 박용우 감독 순서


경품추첨이 끝나자마자 예상치 않은 주연배우와 감독의 무대인사가 있었습니다. 얼~ 박용우 씨는 진회색 양복을 깔끔하게 입었는데, 잘 생겼네요. 엄태웅 씨는 청바지에 코트를 입었는데, 괜찮습니다. 감독님은 뭐 그런가보다. 처음 보는 여배우도 인사를. 영화 잘 봐달라, 입소문 좋게 내달라 등등. 영화배우 봤지롱~ 막 신날라 그래~ 여기선 기분 으뜸이었습니다.

4. 영화 시작했는데 스크린 조율은 계속 해

시작 전 광고 시간에 스크린 조율을 합니다. 화면이 작아졌다, 아래로 내려갔다, 슬금슬금 올라옵니다. 영화 시작했습니다. 화면 아직 안 맞았습니다. 완전 수동인지, 사람 손이 화면을 가렸다 말았다 합니다. 초점은 맞은 듯 이제 화면을 위로 올립니다. 영화 화면 맨 위에 굵은 까만 줄이 있는데, 그게 스크린 상단과 딱 맞아야 눈에 띄지 않을 듯 합니다. 그렇게 영화 화면이 올라가는데, 아주 조금만 더 올리면 되는데...여기서 멈추네요. 영화 화면 제일 위의 까만 줄은 영화 내내 스크린 상단에서 살짝 내려와 있습니다. 대세에 지장 없으니 참으라고요? 네, 뭐 영화에 몰입하다보면 안 보이겠죠, 믿습니다, 믿고요~ 내 돈 주고 보는 영화라면 가만 안 있겠지만, 무료 시사회니 불만이랄 것도 없이 참았습니다. 또, 안 참는다고 어쩔 도리 있나요?

5. 영화 사운드 들쑥날쑥

정확한 설명은 어렵지만, 영화 사운드가 왔다갔다 합니다. 두 인물이 마트 옥상에서 얘기하는데, 높은 산에 올라가 얘기하는 것처럼 귀 먹먹한 소리로 들립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스테레오 사운드처럼 들리기도 하고. 이거 참.

6. 어쩌면 예견된 대형사고가 펑! 갑자기 꺼져버린 영화

여기서 빵 터집니다. 영화 중반을 넘어섰고, 두 주인공이 드디어 마주칠까 고조되는 순간 갑자기 스크린 화면이 꺼졌습니다. 이건 뭐지? 사람들 웅성거리는 사이에 영화관 불이 파박 켜집니다. 나가라는 건가? 종 잡을 수 없는 순간. 처음부터 어수선하고 느슨하게 진행되던 시사회는 여기서 절정을 맞이한거죠. 영화가 갑자기 꺼지는 일이 생기다니. 관계자인 듯한 분이 무대에 올라와서 영사실과 교신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영화는 끊겼던 곳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약 1분 정도 됐으려나? 나가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7. 끝나고 다시 무대에 올라 상황 수습을 위해 노력한 배우들

영화 몰입 안 되는 상황에서 결말이 궁금해 어찌어찌 끝까지 봤습니다. 스크롤 올라가는 여운도 없이 빠르게 자리를 뜨는 관객들. 순식간에 3분의 2정도가 나갔는데, 박용우 씨가 급하게 1층으로 들어와 무대로 올라갑니다. 마이크 들고 엄태웅 씨와 감독에게도 얼른 나오라 합니다. 새로운 편집본이어서 일부러 영화를 봤는데, 중각에 영화가 꺼지는 사태를 보고 놀라서 상황을 수습해보고자 나왔답니다. 박용우 씨 노력에 화가 약간 누그러집니다. 남아있던 관객들은 호응도 크게 해주고, 영화 재밌었다며 박용우 씨 노력에 화답합니다. 영화가 재밌었나? 난 반댈세~

8. 영화 <핸드폰>, 스릴러로 시작했다 어색한 유머로 방향을 트는가 싶더니 치정극으로 끝나
   - 스포일러 주의!


박용우 씨와 엄태웅 씨를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2시간 30분의 긴 영화는 재미 없습니다. 박용우 씨 캐릭터엔 동정도 느낄 수 없고, 사이코패스 같은 치밀함도 없고, 저 인간 왜 저러나...싶습니다. 엄태웅 씨 캐릭터는 나쁘다기 보단 멍청한 사람으로 매력이 제로입니다. 전지현 휴대폰 사건하고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고해서 무척 궁금했는데, 휴대폰 복제에 대한 내용은 없던데요. 휴대폰 찾으려고 위치추적하는 정도입니다. 중반까지 없던 사건이 갑자기 등장해서 관객을 당황하게 만들고, 결말에 <타짜>의 짝귀님이 경찰로 깜짝 출연 - 도대체 왜 만든 인물인지 알 수 없는, 생뚱맞게 등장한 인물의 입을 빌려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있나? - 의문을 남기고 퇴장합니다. 매력없는 캐릭터와 엉성한 사건, 감독이 <핸드폰>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정보화 사회에서 기계문명은 인간성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다? 사랑은 00보다 중요하다? 스릴러 장르의 재미? 죽을만큼 아내를 사랑한 남편과 탐욕으로 인한 파멸?? 감독님의 의도는 도대체 뭔가요??
집의 폭발과 동시에 제 마음도 <핸드폰>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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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종소리 - 워낭소리 old partner




1. old partner - 노동으로 엮인 관계
중노동의 세월. 일한만큼만 먹을 수 있던 과거부터 그들은 함께였다. 할아버지가 한발 내딛으면 소도 한발 내딛었다. 할아버지가 밥 한 그릇이면 소도 죽 한 사발이었다. 그렇게 40년을 살았다. 인간의 100년 보다 긴 소의 40년 인생과 중노동으로 점철된 노인의 고된 삶을 나는 강남 한복판에 세워진 영화관에 앉아 감상했다. 수십년 중 단 일초도 게으를 수 없었던, 그들이 온 몸으로 겪어낸 노동에 깊이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보면 볼수록 할아버지와 소가 당하는 육체의 고통이 절절히 느껴졌다. 자꾸 눈물이 나온다. 아파서도 아니고 불쌍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저들의 반의 반만큼도 안 되는 일을 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창피했다.




2. 한 컷마다 살아 있는 장인정신
다큐라고 해서 사실, 카메라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TV를 장악한 흔들거리는 6m 카메라가 심히 못마땅한 처지라 내 돈을 몇 천원씩 주고 보는 큰 스크린에서까지 그런 걸 보고 싶진 않았다.
3년을 찍었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숫자 3이지, 하루로 셈하면 그 단위가 만만찮다. 깊은 산골의 농촌 풍경이 살아 있었고, 계절의 변화가 컷 마다 느껴졌다. 할아버지와 소의 투샷, 할아버지 얼굴의 극단적인 클로즈업 등은 물론  청개구리, 잠자리 인서트까지 한컷 한컷마다 장인정신이 살아있었다. 3년간 몇 개의 테잎이 촬영되었는지, 오디오가 잘못되어 아까운 장면을 버린 적은 없는지, 3년간 감독은 어떻게 돈 벌어 생활을 해나갔을지 소소한 촬영과정이 전부 궁금했다. 편집하면서 아까운 장면을 버려야 할 때 얼마나 속이 쓰린지 적게나마 경험이 있기에 감독이 편집하면서 들였을 공이 가히 짐작된다.
잘 만든 다큐는 참 재미있었다. 다큐가 '재미있다.'




3. 워낭은 죽지 않았다 - 다큐의 음악은 '워낭소리'
소가 조용히 눈 감던 날, 숨이 떨어지기 직전에 할아버지는 본인 손으로 코푸레와 워낭을 떼 냈다. 할아버지는 머리가 아파서 누워 있다가도 소의 워낭소리만 들리면 움찔하곤 했는데… 소의 목 밑에서 풀려난 종-워낭은 이제 할아버지의 낡은 집 처마끝에 매달렸단다. 소가 움직이는 듯 바람이 불 때면 워낭소리는 땡, 땡, 할아버지 곁을 지킨다.

다큐를 완성하는 음악은 다름아닌 워낭소리였다. 매 걸음이 인생의 마지막 걸음처럼 무거워 보였던 소의 움직임은 워낭소리가 있었기에 생명력이 느껴졌다. 소가 지치면 워낭소리도 지쳤고, 소가 꾸준히 걸으면 워낭소리도 힘이 났다. 소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워낭, 워낭소리. 워낭소리는 소의 생명이자, 기운이었고, 할아버지와 소가 나누는 교감 그 자체였고, 다큐를 완성하는 음악이었다. 아름다운 화면과 함께 소리로 기억될 다큐이다.

4. 내래이션은 할머니의 잔소리
다큐를 이끄는 해설은 할머니의 잔소리였다. 할머니는 농약치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저 여자는 농약 치는 남편 만나서 편히 살고, 나는 소한테 해 갈까봐 농약 절대 안 치는 남편 만나서 고생한다."고 부지런히 '설명'한다. "라디오도 고물, 할아버지도 고물" 이라고 껄껄 웃기도 하고, "열 여섯에 시집와 할아버지 만나서 이꺼정 일만 하고 고생한다."고 신세한탄도 늘어 놓는다. "팔아! 소 팔아!"하고 할아버지를 닦달하다가도 소가 안쓰럽고, 아픈 할아버지가 걱정이다. 어떤 내레이션이 할머니 잔소리만 했을까. 다큐가 웰메이드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5. 잘 가라, 소야. 참말로 고맙다.
다큐의 시작은 소의 죽음을 알린다. 소를 위해 불공을 드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들이 애쓰지 않아도 소는 그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소가 그 많은 땔감을 해 놓은 것도 그래서가 아니겠는가. 소의 죽음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 이유는 소의 그런 마음을 너무 생생히 느꼈기 때문이다. 소는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의 다리였고, 함께 일하는 동료였고, 같이 사는 가족이었고, 작은 움직임에도 마음이 쓰이는 친구였다. 할아버지에게 소 또한 그런 존재였으리라. 할아버지 할머니 소가 전하는 관계의 울림이 눈물이 되어 콸콸 쏟아졌다. 나의 인생에도 저런 파트너가 있어주길…



6. 할아버지 할머니 건강하세요
도시와 시골의 대비만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은 다른 나라 이야기 같았다. 내가 앉아 있는 영화관과 봉화 산골마을의 거리, 딱 그 거리만큼의 괴리감. 그러나 내가 '동화같은' 이라든가 '정겨운 시골 풍경' 따위의 단어를 쓸 수 없는 이유는 노인의 얼굴에 깊게 파인 세월과 노동의 흔적 때문이다. 그런 세월을 겪어낸 이에게 몽롱하고 불분명한 단어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난 시골생활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정겨웠던 적도 없다. 그들의 현실에 열렬한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나도 내 현실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몸 건강하시길.

※ 모든 사진의 출처는 <워낭소리> 홈페이지 ☞ http://blog.naver.com/warnang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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