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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20 <자기 앞의 생> '창녀'의 아들이 전하는 삶의 진리 '사랑해야 한다' (19)

<자기 앞의 생>‘창녀’의 아들이 전하는 삶의 진리 ‘사랑해야 한다’


몸 파는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십여 명의 여성이 일제히 웨딩드레스를 차려 입고 온돌방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성매매와의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전부 할 말 없다며 등을 돌려 버렸다. 그 싸늘함에 기죽은 내가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자 휴대폰 게임에 열중하던 한 여성이 “이거 밖에 할 줄 없는데 우리가 가긴 어딜 가.”하고 무심한 목소리의 말을 던졌다. 초보티가 풀풀 나는 나를 배려해서 인터뷰에 응해 준 것이다. ‘창녀’인 자신을 찍어대는 카메라까지 포용해 준 그녀에게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고, 지금껏 남아있던 그 여운이 소설 <자기 앞의 생>에 끌린 이유이다. ‘엉덩이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과 그 안에서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는 그 감동을 다시 불러일으켰고, 나를 외면했던 하얀 웨딩드레스의 그녀들이 유태인, 아랍인, 아프리카인으로 살아나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내가 ‘창녀’로만 대했던 그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들의 아들일 법한 모모가 읽기도 전에 걱정되기 시작했다. 창녀의 자식인 열 살 소년에게 어떤 핍박이 닥칠지, 거기다 아랍계이니 ‘호로자식’으로 끝날 수 있는 욕에 몇 가지가 더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걱정과 다르게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강한 애착으로 모모를 돌보는 로자 아줌마와 성인(聖人)을 닮은 하밀 할아버지가 있는 그곳이 어쩌면 '창녀'인 엄마의 품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경이 주는 영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얼굴 한 번 못 본 엄마를 떠올리면서 ‘좋은 포주가 되어 엄마를 돌봐주었을 것’이라 확신하거나, 늙고 뚱뚱하고 병든 로자 아줌마를 위해 ‘나는 늙고 못생기고 더 이상 쓸모없는 창녀들만 맡아서 포주 노릇을 할 것이다’고 계획하는 모모를 볼 때면 그 환경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웃음이 나올 만큼 재미있었다. 자칫 비참하고 무거울 수 있는 부분에서 열 살만큼의 안목을 크게 펼쳐 놓았기 때문에 제목 <자기 앞의 생>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을 덜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 앞의 생 프랑스판 표지

그림출처 : http://blog.naver.com/miejin27/13305195

모모는 로자 아줌마와 하밀 할아버지 뿐 아니라, 아프리카계 포주 은다 아메다, 과거 세네갈 출신 권투 챔피언이었으나 성전환 수술 후 창녀가 된 롤라 아줌마, 따뜻한 유태인 의사 카츠 선생님 등등 국적·나이·직업을 불문한 다양한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서로 소통하면서 모모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온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고 그 실천은 로자 아줌마에게 향한다. 병원에 실려 가서 식물인간으로 연명하는 것보단 죽음을 선택하고 싶은 로자 아줌마를 위해 모모는 모두를 속이고 지하실로 들어간다. 아줌마가 자신의 죽음을 위해 마련해 놓은 그 곳에서 편히 죽을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그녀가 숨을 거두어도 모모는 여전히 그녀 곁을 지킨다. 생전에 아줌마가 좋아했던 향수를 뿌려주고 바로 옆에서 잠들면서, 시체 썪는 냄새를 쫓아온 이웃들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모모는 로자 아줌마 곁을 지킨다.

죽은 아줌마를 떠나보낸 후, 소설은 초반에 품었던 의문에 답을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처음 이 질문을 한 사람도 모모였지만, 답을 찾은 사람도 모모 자신이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살 수 없으므로 항상 사랑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창녀’의 아들 모모가 보통인 우리에게 전하는 생의 진리이다.

기분이 묘했다. 온돌방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앉아 있는 기이한 광경을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어안이 벙벙한 채로 마지막 장에서 손을 뗐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알고 있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를 ‘창녀’의 아들 입에서 듣고 나니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이상했다. 극과 극은 통하는 걸까? 내가 아는 신과 모모의 주장은 비슷했다. 제일 위에 있는 신과 제일 아래에 있는 모모가 말한 ‘사랑’을 그 사이 어디쯤엔가 있는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했다. 신에게 했던 것처럼 모모에게도 똑같이 대답하겠다. 아멘.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다. 이제 비로소 내가 마주했던 ‘창녀’들과 화해한 기분이 들었다. 모모로 인해서 그녀들도 나도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자기 앞의 생>을 쓴 작가 ‘에밀 아자르’는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작가 ‘로맹 가리’가 기존의 이미지를 버리고 새로운 주목을 끌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로맹 가리’가 자살한 이후 유서에서 밝혀졌다는 이 사실은 당대에도 큰 화제가 되었지만, 여전히 소설에 따라 붙는 흥밋거리이다. 별 짓 다하는 작가의 정신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 다양한 등장인물을 설명하는 모모의 횡설수설하는 말투에 귀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작가도 모모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편지봉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