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 The Road>, 멸망 뒤에 삶이 있었다


1.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코맥 매카시

시작은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였다. 영화의 아득한 피비린내에 도취되어, 내친김에 책을 찾아 봤다. 도통 모르겠다. 작가가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는지 분위기는 느끼겠는데, 머리로 이해가 안 된다. 답답하다. 분명 뭔가 말하고 있는 사람의 입은 보이는데 소리는 전혀 들을 수 없는 답답함. 분명 작가는 불친절하다. 따옴표 조차 안 쓴다.

코맥 매카시를 찾았다. 종잡을 수 없는 지식이 넘쳐나는 온라인으로도 건질 내용이 별로 없었다. 유명한 작가라는 확인은 되었다. 유명했군. 작가는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히 숨겨두었나보다. 에잇. 한참 후에 손을 털고 일어났다. <피의 자오선>? 후에 눈에 띄면 읽어봐야겠다. 그게 다 였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불친절한 미국 노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였고 상도 많이 받았다,가 내가 알 수 있는 전부였다.

코맥 매카시? 매카시즘의 매카시야? 혹 그를 아는 사람이 있나 물어보면 이런 대답을 듣기 일쑤다. 그 사람은 아닌데 나도 누군지는 잘 몰라. 미국의 유명 잡지에서 뽑은 100대 소설 중 상위에 꼽히고, 헤밍웨이나 멜빌 같은 유명한 작가의 계보를 잇는대나, 암튼 그래.

2. 대재앙으로 멸망한 문명, 길 위에서 삶은 계속된다 <로드> 


등장인물도 줄거리도 간단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길을 걸어간다. 이미 지구에는 대재앙이 닥쳐서 문명이 몰락했다. 재가 날리는 하늘은 햇빛을 가렸고, 버려진 도시는 재만 가득하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살아난 사람들은 서로를 피해 숨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는 세상. 그래서 아버지는 언제든 자살할 수 있도록 두 발이 장전된 총을 몸에 지닌다.

아버지와 아들은 음식을 찾기 위해 이미 몇번이고 털렸을 빈집을 또 뒤지고, 마트를 뒤지고, 쇼핑센터를 뒤진다. 음식을 찾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다. 딱 한번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방공호를 발견해서 며칠 간 풍족하게 먹고 쉴 수 있었으나 다시 길로 나선다. 누군가에게 발견되면 잡아 먹힐지도 모르니까. 해안가에 도착하면 희망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폐허 속의 희망. 죽음 속의 희망. 희망, 그들은 며칠을 굶고 사람을 잡아 먹은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그 희망을 향해 길로 나간다. 도착한 해안가엔, 그들이 지나온 세상 어디나 그랬듯, 어둠과 죽음 뿐이었다.

「다음 날 정오에 도시를 통과했다. 권총은 금방 손에 잡을 수 있도록 카트 위에 접은 방수포에 올려놓았다. 소년을 옆에 바짝 붙이고 걸었다. 도시는 대부분 탔다. 생명의 흔적은 없었다. 거리의 차에는 재가 떡처럼 덮여 있었다. 모든 것이 재와 먼지로 덮여 있었다. 마른 진창에는 화석 흔적들. 문간에는 말라붙어 가죽만 남은 시체 한 구. 빛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남자는 소년을 더 바짝 잡아당겼다. 네가 머릿속에 집어 넣은 것들은 거기 영원히 남는다는 걸 잊지마. 한번 생각해보렴. 남자가 말했다. 
어떤 건 잊어먹지 않나요?
그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잊고 잊어버리고 싶은 건 기억하지.」

3. 희망도 강요되어 질 수 있다

임신한 여자가 속한 한 무리가 지나간다. 다음 장면에서 갓 태어난 태아로 추정 되는 것이 바베큐처럼 구워지고 있다. 토 할 듯한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지옥에 다름아닌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살아야하는 이유가 뭘까? 왜 그들을 자꾸 길로 내보내고 걷게 만드는걸까? 혹시 살 수 있는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해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버지는 결론을 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세상이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 <로드> 속 세상에선 '희망'이란 단어는 사라져야 한다. 작가여, 희망을 강요하지 말아라. 그것도 폭력이 될 수 있다.

마지막 장에서 희망을 찾은 아들을 확인했어도 난 죽음의 이미지를 놓을 수 없었다. 그만큼 <로드>를 읽는 내내 멸망한 지구가 보여줄 수 있는 암울함을 온 몸과 마음으로 겪어낸 것이다. 책을 읽는 며칠 동안 굶어 지낸 사람은 나였고, 죽음과 사투를 벌인 이도 나였다. 아버지와 아들 옆에 서서 지옥보다 더 지옥같은 세상을 함께 걸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헤어나올 수 없었다. 아들이 마지막에 찾은 희망을 믿을 수 없다. 믿기엔 너무 짧다. 더 보여달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4. 길 위에 아버지와 아들, 영화로 그려지다

할리우드는 멸망한 세상을 걸어나가는 아버지와 아들을 돈 주고 사서 영화로 보여주겠단다. 지구의 종말을 폐허를 시체를 잘 묘사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부디 그들의 희망은 희망답게 보여주지 않았으면 한다. 할리우드식으로 매끈하게 잘 빠진 희망이 나올까 걱정된다. <로드> 속 희망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로드>의 희망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양이어야 한다. 가슴 먹먹함으로 쥐어 짤 눈물도 없는, 모든 것을 체념한 후에 나올 수 있는 희망이 <로드>의 희망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식의 정공법이면 통할 수도 있겠다. 영화가 기다려진다.
Posted by 편지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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