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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1.16 "여자 나이 서른이면 절망이야" 15

생리대 꼭 숨겨야 하나



몇년 만에 보는 친척 조카가 집에 놀러왔습니다. 부엌에서 이야기 나누는 어른들을 피해서 이 방 저 방을 어슬렁거리더니 어느 새 제 방에도 들어왔습니다. 좁디 좁은 방이라 어디 앉으라고 할 곳이 없어서 주저하고 있는데, 아뿔싸, 아무렇게나 놓아둔 생리대 봉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요 녀석이 눈치 못 채게 치우려는 심산으로 엉금엉금 움직이고 있는데, 제 몸짓이 수상했던지 바로 녀석에게 들키고 말았죠. 중학생. 왕성한 호기심. 말 수 없지만 고집세 보이는 표정. 생리대를 집어 든 녀석에게 제가 엄하게(?) "있던 자리에 내려놔."라고 했습니다.

녀석은 신경도 안 쓰더군요. 요즘 애들이 다 이럽니까? 쯧쯧. 어른 말을 막 무시하고, 제 품에 있던 강아지에게 생리대를 던져서 물어 오게 하고, 주거니 받거니,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저보다 덩치가 커서 쥐어박을 엄두도 안 나고... 찢기는 생리대, 찢기는 내 돈. 생리대 은근히 비싸잖아요.

제 방이 좁았던지 녀석이 강아지를 데리고 거실로 나가려고 하더군요. 제가 생리대 놓고가,하고 다시한번 엄하게(?) 말했습니다. "왜요?" "생리대잖아. 그거 사람들 다 보게 갖고 있는거 아냐." "왜요?" "아, 왜긴 왜야, 남들이 보면 창피하잖아." "왜요? 왜 창피해요?" "그냥 창피해. 그니까 냅두고 나가." "여자들 다 하는게 뭐가 창피해요?"

그러게요, 왜 창피할까요? 저는 생리대가 왜 창피해서 거실로 못 들고 나가게 했을까요?

생리대는 꼭 숨겨야 하는 물건??

어릴 때 생리대를 책상에 꺼내놓았다고 선생님은 절 나무랐고, 엄마는 아빠나 남동생이 본다고 욕실에 못 두게 했습니다. 갑자기 생리를 시작한 친구가 생리대 하나 달라고 하면, 누가 볼 새라 테이블 밑으로 건네거나, 가방을 통째로 주어야 했습니다. 슈퍼에서 생리대를 사면 계산하는 아주머니는-아저씨도-당연한 듯이 검은 비닐봉지에 싸주셨죠. 난 아무 요구도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누군가 검은 봉지를 들고 있으면 "너 생리대 샀어?"라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대학 때 처음 만난 남자친구와 첫 공식 데이트 하던 날, 차마 "나 갑자기 생리를 시작했어."란 말을 못해서 불편함을 내색 못하고 끌려다니다시피 했습니다.

"생리해." "마법에 걸렸어." "그거 해." 가끔 "터졌어."까지. 왜 저는 이 당연한 말을 회사 동료에게, 선후배에게, 친구들에게, 상대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하지 못 했을까요? 여성이라면 누구나 하는 생리를, 생리대를 완벽히 숨기지 못해 그토록 안달냈을까요?

생리대를 숨기면 여성과 남성의 소통이 막힐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박힌 습관 때문에 아직도 생리대를 숨겨야 한다는 강박은 있지만, 차츰 나아지고 있습니다. 남자친구(보자기)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보자기도 처음엔 창피해했지만, 제가 생리때만 되면 짜증내고 집에만 있으려고 하니깐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하나씩 얘기를 꺼내게 되었구요. 생리에 대한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하면서 생리에 대해 생리대에 대해서 관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남자들이 생리에 대해 얼마나 알지 궁금합니다. 여성이 생리대를 숨기면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단절을 낳지 않았나 의심해 보았습니다. 여성이 숨기니 남성도 모르고, 남성이 생리를 모르는 만큼 여성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닐까. 생리를 알아야, 여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리. 제 화장대 위에는 김연아 선수 얼굴이 박힌 생리대 봉투가 아직도 있습니다^^

김연아 선수도 생리대를 숨길까요


Posted by 편지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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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나이 서른이면 절망이야"


2009년을 며칠 앞두고 선배가 메신저로 말을 걸더니 새해에 몇 살이냐고 묻습니다. 저는 별 생각없이 '30, 서른, 써티, 이립'하고 장난처럼 답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선배의 대답. "여자 나이 서른이면 절망이야." 하, 분명히 농담으로 던진 말일텐데, 나도 농담으로 받아? 아니지, 여성비하에 나이차별을 대놓고 했으니 농담이라도 봐 줄 순 없지, 정색을 하고 화 내? - 약 10초간 큰 혼란 끝에 한 말은 "아, 그런가요?"입니다.

2009년 1월 1일을 시작하는 0시에 종이 땡 치고, 공식적인 서른이 되자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절망스럽나?'

힘내라 서른

서른의 초상?!



결혼을 종용하는 부모님과 반토막 난 펀드, 포기한 꿈의 잔여물가 그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린 이력, 늘어난 기미와 주근깨, 주름, 늘어난 뱃살 특히 아랫배, 무한도전 멤버들보다 더 저질 체력, 나도 모른새 고착되어버린 아집… 이 정도면 '절망'이란 단어에 버럭할 일은 아니군요.


힘내라 서른

보자기와 주먹

결혼 얘기 꺼내는 부모님을 입 막음 할 수 있는 재주, 언제나 내 말에 귀 기울이는 마음이 따듯한 애인, 빌리든 꾸든 약간의 현금 동원력, 갖은 직업이 가져다 준 다양한 경험, 어느새 구축된 말발, 어느 누구하고도 대화할 수 있고 하고 싶다는 열린 마음, 20대 초반이라고 사기칠 수 있는 얼굴, 서로 신뢰하는 친구들, 아직은 꿈 꿀 수 있을거라는 희망, 자리 잡아가는 나만의 취향과 안목,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포용력… 하하, 너무 억지인가요? 내가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들.

살펴본 결과, '절망'은 아니라고 결론 지어 봅니다. 스물 아홉이었던 어제와 서른이 된 오늘이 비슷한 일상이듯 나에게 있는 것들도 스물 다섯 혹은 그 아래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20대를 지날 땐 내가 갖고 있는 지조차 몰랐다고 할까요, 스스로 의식하고 그 근원을 캐내려 애써 생각하는 태도가 서른에 달라진 점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10단위의 나이가 의미있는 이유는 스스로 돌아보고 결산하는 특별한 시간이기 때문일거라 생각합니다. 

선배의 말에서 '절망'에 방점을 찍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자'에 대한 생각은 좀 더 해봐야겠습니다. 스스로 여성임을 깨달은 지 얼마 안되거든요. 20년이 넘도록 자각 못한 사실을 알고 나선 충격이 대단했습니다. 그만큼 '여성'에 대한 고민은 독자적으로 풀고 싶습니다. 음...고민은 '절망'에서 연유했으나 결론은 '서른'에서 났군요. 

이제 본격적으로 서른을 살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큰 기대도 섣부른 실망도 없습니다. 어제처럼 오늘도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저의 몫입니다. 마흔이 되는 순간, "서른은 살아볼만 했습니다. 마흔도 기대되네요."하고 자신있게 말할 정도면 좋겠네요. 여러분도 여러분 나이 만큼 행복하시길.
 
Posted by 편지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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