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상황에서 여성의 최고 무기는?


아침에 뉴스 검색을 하다가 치한을 만났을 때 여성의 핸드백이 무기가 될 수 있단 기사를 봤습니다. 홍보기사 같긴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네이버 메인에 올랐더라고요.

괴한 만났을때 여자의 최고 무기는 핸드백   
 
괴한을 만났을 때 유용한 무기는? 핸드백.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사람과 동승할 때는? 층수 버튼을 먼저 누르지 말 것. 강호순 연쇄살인을 계기로 여성들의 자기 보안 필요성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출처 : 매일경제 기사원문보기>

기사 제목을 보자마자 제가 스무 살때 겪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성추행, 제가 당한 적이 있었고 당시에 가방을 사용해서 패 주었죠.

신촌에 있는 유명한 술집이었는데, 맥주 마시면서 음악 듣는 곳으로 유명했어요. 한쪽 벽을 꽉 메운 LP판을 쉬지 않고 틀어대는 긴 머리의 주인 아저씨. 단순히 술 마시러 오는 곳보다는 음악을 즐기러 와서 맥주도 한잔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벌써 십년이 됐네요. 당시엔 자주 갔지만 그 일 이후론 신촌 근처도 가길 꺼려했기에 아직 그 곳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일이 있던 날도 여느 날처럼 맥주를 앞에 두고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저나 친구나 술을 잘 못해서 병맥주 각 1병이면 음악에 맞춰 몸을 살짝 흔들 정도로 흥을 돋울 수 있었습니다. 학생이다 보니 돈도 없고, 많이 마시고 싶은 마음도 없고, 맥주 한 병에 몇 시간씩 원하는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누리는 곳.

그 곳은 화장실이 홀 안에 있어서,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겠다, 남녀 각각 하나의 화장실이겠다, 줄이 길지 않더라도 테이블 사이까지 나와서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느 날처럼 화장실에 가려고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제가 맨 뒤였어요.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는데 몇 발자국 건너에서 어떤 남자가 술에 취해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면서 슬슬 제 쪽으로 걸어오더군요. 화장실 가나보다, 엄청 취했구만...하고 생각하는 둥 마는 둥 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제 뒤로 오더니 엉덩이를 만졌습니다. 양손으로. 스치거나 모르는 척 만진 것도 아니었죠. 한번을 '제대로' 만지더니 어딘가로 훌쩍 가버렸어요.

시간이 흘러서 이런 경험이 있는 분들하고 얘기해 보니, 대부분 저처럼 너무 놀라서 꿈쩍 못 했다고 하더군요. 전 그 사람이 엉덩이에 손을 갖다 댄 순간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헉' 소리도 낼 수 없었어요.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 순식간에 벙어리가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복잡한 술집이고 다들 음악 듣느라 절 본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으로 그 자리에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친구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돌아갔습니다.

친구가 제 굳은 얼굴을 보고 왜 그러냐고 묻는데 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화나고, 창피하고, 어찌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입이 움직이지 않더군요.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술집을 나갈 생각에 가방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괜히 눈물이 났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출입문을 향해 나가고 있는데, 아뿔싸, 그 놈이 바로 출입문 근처에 앉아 있는 겁니다. 얼굴을 본 순간,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가방으로 내려쳤죠. 한번 두번 계속 사정없이 내리쳤는데, 그 남자는 꿈쩍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습니다. 너무 취해서 자기가 맞는지조차 몰랐던 거죠. 내가 수치심을 느낀 만큼 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그때부턴 본격적으로 울었던 것 같습니다. 계속 그 남자를 가방으로 때리면서 소리내서 울었어요. 친구가 왜 이러냐고 소리치고, 주인아저씨 뛰어와서 말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이 그러다가 술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저를 따라 나온 친구가 저 남자가 너한테 무슨 짓 했냐고, 자기가 가만 안 두겠다고 욕하면서 날뛰는데 '범인'의 일행인 듯한 남자분이 저희를 쫓아 나오셔서, 왜 그런지 묻더군요. 저는 흥분해서 아무 말 못하고 분노에 찬 울음범벅이었는데, 짐작을 하셨는지 취한 친구 대신 사과하겠다며 백배 사과하셨습니다.

'최고의 무기 핸드백'이라 할지언정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은 씁쓸한 경험. 시간이 많이 흘러서, 문제 상황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핸드백은 최고의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최고의 무기는 바로 '정신 똑바로 차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울며불며 뛰쳐나오는 것보단 분명하게 알리고 사과를 받았다면 - 물론 완전 술이 취해서 정신 빠진 놈이었지만 - 어땠을까? 정도가 약한(?) 성추행에 그쳤으니 망정이지, 더 심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면 저처럼 흥분해서 때리는 행동은 오히려 나쁜 효과를 불러오리라 여겨집니다.

성추행이나 괴한을 만나는 일 따위 전혀 없으면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니 조심할 수밖에요. 아무리 대책을 세운다한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사안의 경중을 떠나 상처가 남게 마련입니다. 여성도 남성도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할 일입니다. 저한테 가했던 놈도 그저 취해서 저지른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놈은 자신의 잘못을 모른 채 발 쭉 뻗고 자겠죠? 저는 아직도 저런 기사만 보면 부르르 화가 나는데...
Posted by 편지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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